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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성남중진작가전 1

분리된 도시의 삶-광주대단지사건으로부터

이돈순展 / Lee Donsoon / 李敦淳 / 회화, 설치, 영상

2020_0724(금) ▶ 2020_0816(일)

 

 

 

 

 

 

 

 

 

 

 

 

 

 

 

 

 

 

 

 

 

 

 

 

 

 

 

 

 

 

 

 

 

강철 새잎의 풍경들

- 이돈순의 못의 회화, 생동하는 불꽃의 미학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한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민의 불복종』에서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_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에서

 

이돈순은 못을 때려 박아서 풍경을 새긴다. 수 천 번의 못질로 찢기고 터져서 드러나는 살풍경은 상처투성이다. 망치로 대가리를 두들겨 발끝을 밀어 넣는 순간들은 참혹하다. 풍경은 발끝에 있고 상처는 대가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을 지탱하는 목판에 있다. 하나의 못이 목판을 뚫고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못의 발끝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찢겨진 현존을 뜨겁게 확인시킨다. 1971년 8월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광주대단지와 재개발로 철거되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두 지역은 같은 장소다.

못의 몸들이 비집고 들어가 빼곡히 몸을 맞대고 기립한 그 날은 더웠고, 숨찼다. 더운 비로 흥건했다. 한 나라의 국민도 시민도 되지 못한 채 떠밀려 쫓겨 온 들판에서 수만의 사람들은 소리치고 욕하고 덤비고 따졌다. 오장이 비어서 육부가 뒤틀리는 나날을 견디며 살았고, 그 삶이 비리고 말랐을지라도 나랏님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나랏님이 돌변해서 아귀로 덤벼들어 생존의 목을 비틀었다. 사람들은 떼로 일어섰다. 3만 6만 10만으로 궐기했다.

이돈순은 그날의 기록을 찾아서 몽타주했다. 이날저날의 장면을 덧붙여 몽타주한 풍경의 뒤통수에 못을 박았다. 못이 하나 둘 셋 목판을 찢고 풍경의 안쪽을 채웠다. 그 안쪽이 풍경의 얼굴이었다. 관객은 상처뿐인 풍경의 얼굴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의 어렴풋한 표정을 마주한다. 못의 발끝이 솟구쳐 살벌하게 쏘아대는 낯빛은 그러나 카오스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 디딜 틈이 없다. 찌를 듯이 덤비는 못의 외침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궐기는, 봉기는, 투쟁은 폭도로 난동으로 규정되었고, 그날 이후의 삶은 가난으로 찢어졌다. 가난은 비참해서 견뎌 내지지가 않았다. 사는 게 아니라, 어찌어찌 살아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숨 막히는 빈곤의 현기증은 그날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49년이 흘렀다. 목판에 못을 내리꽂아 풍경의 들녘을 강철로 싹 틔우는 이돈순의 작업은 그러므로 그 모든 날들의 49재일 것이다. 온갖 억압과 모순과 부조리가 층층이 현실로 쌓여서 불우(不遇)가 된 이승의 슬픈 목숨을 해원하는 씻김이라 할 것이다.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에서 <2020성남중진작가전I>으로 초대한 그의 전시는 “분리된 도시의 삶-광주대단지사건으로부터”의 주제를 달았다. 올해부터 앞으로 3년 간 광주대단지 사건 50주년을 기념하는 첫해의 첫 전시다. 광주대단지는 성남시의 뿌리다. 그 뿌리의 실체를 더듬어 성남시의 시사(市史)를 온전히 복권시키려는 이번 기획은 역사와 미학의 창조적 대화일 것이다. 그는 15점의 작품을 신작으로 제출했다. 1971년 8월의 풍경과 2020년 8월의 풍경이 오버랩 되는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 현재의 해우이면서 동시에 미래 성남시를 위한 상상적 제안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화두다. 몇 개의 작품을 살핀다.

#1. <창(窓)-산이 된 사람>, <시민불복종-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행위자들> :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이돈순은 비탈진 산등성이에 옹기종기 모여들어서 시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하나를 찾았다. 그들이 서 있는 민둥산은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하다. 사람들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누군가는 우산을 썼고 누군가는 발꿈치를 들었다. 그는 이 사진을 바탕으로 몇 개의 드로잉을 그렸다. 사람과 산등성이와 민둥산이 한 몸으로 흘러내리는 표현이다. 최종적으로 그는 사람과 산을 구분할 수 없는 검은 그림자로 드로잉을 완성했다. 그 드로잉을 목판 뒤에 좌우가 뒤집히도록 해서 붙이고 못을 박았다.

<창(窓)-산이 된 사람>은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린다. 제목에 들어 간 ‘창(窓)’은 철거를 며칠 앞둔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의 한 빈집에서 뜯어온 녹슨 방범창이다. 이 집은 공교롭게도 광주대단지사건과 같은 해에 지어져 50년을 버텨왔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키고 가두었을 X자 그물망의 철 구조물은 이제 주인을 잃었다. 남한산성에서 이어진 산비탈에 겨우 문지방을 세웠던 집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중이다. 그 방범창에 갇힌 듯 들어 찬 풍경은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경 성남출장소 뒷산 산등성이에 모여든 사람들이다. 49년의 시차를 두고 과거와 현재가 팽팽하게 줄 당기면서 서로를 응시하는 이 작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비루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고발한다.

소로는 말했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다. 그러나 소수가 있는 힘을 다해 막아낼 때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고. 또 이렇게도 주장했다. “만약 옳은 일을 하다 감옥에 갇히면 그곳은 격리되어 있지만 실은 더 자유롭고 더 명예스러운 곳이다.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감옥이다.”라고. 녹슨 방범창은 명예를 가지고 산 사람들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도둑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장치였으므로.

광주대단지사건의 첫 발화는 그날 8월 10일의 아침이었다. 11시에 서울시장이 주민들을 만나러 온다했다. 새벽부터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한강이남, 제2의 서울’이니 ‘신천지’ 따위의 약속은 이미 잊었다.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뒷산을 올랐다. 순식간에 3만이 5만으로 운집했다. 열흘 전인 8월 1일, 경기도가 가옥취득세를 고지하자 사람들은 주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다. 서울시는 이 궐기를 눈치 채고 9일 부시장을 내려 보냈다. 타협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서울시장이 다시 내려와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12시가 다 되도록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서울시장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또 속았다. 내려가자!”를 소리치며 사업소로 몰려갔다. 그들의 손에는 곡괭이, 삽,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소로가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부를 나의 정부로 단 한 순간도 인정할 수 없다.”고 외쳤던 순간의 ‘시민 불복종’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혁명적 순간을 <행위자들>로 재구성했다.

못을 때려 박는 일은 검은 그늘의 풍경을 채우는 일이다. 사람과 산이 한 몸으로 엮여서 탄생하는 그늘은 못 그림자이지만, 한 개 한 개의 못이 들어차면서 그림자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풍경은 살아 오른다. 나무를 할퀴고 뜯겨내고 부수면서 박히는 못들은 판자촌을 부수고 황무지로 몰았던 49년 전의 현실을 체현한다. <창(窓)-산이 된 사람>이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서 표현한 것이라면 <행위자들>은 시민 불복종의 순간이, 그 혁명적 항거의 순간이 얼마나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벌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초석도 토대도 없이 황폐하고 거칠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밀려난 삶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가는 벽돌 몇 개와 투바이투 각목, 합판으로 반달갤러리 구석진 곳에 그 상징의 비탈길을 만들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사람들. 그들은 낡은 청바지를 입었다. 에코폼이 몸이다. 누군가 입고 버린 청바지와 그것을 입은 에코폼. 그렇지만 온몸의 혈맥이 못이어서 그 못의 힘으로 일어선 사람들의 질주를 보여준다.

#2. <광주대단지의 항거­배고프다 직장 달라>, <불타는 광주대단지>, <촛불> :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광주대단지사건이 폭도인지 항거인지, 또 난동인지 봉기인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대단지사건의 부조리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극한의 나날이어서 결사항전으로 붙어야 했으니까. 불의에 저항하고 억압에 맞서는 봉기는 민중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투쟁어다. 1971년 8월의 사진들은 그 투쟁어의 진실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사람들은 산등성이를 뛰어 내려가 대단지 관공서에 불질렀다. 성남출장소 옆의 관용 지프도 뒤집어서 불태웠다. 버스를 탈취해서는 서울로 향했다. 그 장면들은 흑백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돈순은 이 장면들에 주목했다. 도랑에 처박혀 불타는 지프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데, 그 뒤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우산을 쓴 채 웅성거린다. 버스 이마에는 “배고프다 직장 달라”를 붙이고, 버스 지붕으로 올라탄 사람들은 “이간정책 쓰지 말라. 단지시민 안 속는다.” 등의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었다. 아이들이 뛰면서 버스를 따른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중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광주대단지의 항거-배고프다 직장 달라>는 화면의 맨 위 상단에 그 버스를 배치했다. 버스 아래로 흙을 퍼 나르는 아낙들과 물을 받기 위해 양동이를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중첩시켰다. 세 개의 장면이 하나의 몽타주로 완성된 이 작품은 광주대단지사건을 미학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완성하고 있다. 그림의 내부 구조는 감로도(甘露圖)다. 1980년대 미술동인 두렁이 창시한 걸개그림 구조와 다르지 않다. 걸개그림은 감로도의 회화 미학과 괘불탱(掛佛幁)의 의례형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감로도는 지옥의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설법을 듣는 불화이고, 괘불탱은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탱화다. 간단하게 말하면 감로도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불화이고, 사찰 마당에 거는 탱화는 괘불탱이다. 걸개그림은 ‘거는 그림’을 뜻하는 괘화(掛畵)를 풀어쓴 말이다. 상단.중단.하단의 삼단 구조로 이뤄진 감로도는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을 취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상황을 한 화면에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돈순의 작품도 똑같다. 여수 흥국사 감로도(1741)는 하단에 66가지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집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돌다가 죽고, 자신을 칼로 찔러 자살하고, 재물을 지키다가 죽고, 간통죄로 벌 받아 죽고, 노비가 주인을 죽이고, 주인이 노비를 죽이고, 들불에 타서 죽고, 강물에 빠져 죽고, 우물에 빠져 죽는 장면들이다. 이렇듯 여러 형태로 죽은 망령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망령들이 중단의 천도의식을 통해 불보살의 영접을 받아 극락에 왕생한다는 정토왕생사상을 감로도는 드러낸다.

<광주대단지의 항거-배고프다 직장 달라>의 하단은 감로도의 하단이 보여주는 참혹한 지옥의 장면들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 지옥이 있었다면 광주대단지였을 것이다. 의료시설도, 오물처리장도, 공동화장실도, 우물도, 일자리도, 집도, 쌀도 없었다. 전쟁터 난민의 삶보다도 못했다. 그 현실을 바꾸려는 삶이 중간에서 펼쳐진다. 물을 깃고 집을 지어서 먹고 살려는 생존의 아수라 현실이다. 그들에게 정토는 그곳이었다. 싸워서 쟁취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상단에 배치한 버스는 ‘희망’일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이 하늘이고 한울이며,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앞당기는 혁명이었다.

이돈순은 이 거대한 희망의 감로도를 목판에 새겼다. 시멘트벽돌로 5단을 쌓은 세 기둥에 작품을 세웠는데 그 장면이 성남의 역사였다. 그는 수천수만 개의 못을 박아서 장면을 완성했다. 못이 박혀서 사람을 이루고, 못이 박혀서 대지를 이루고, 못이 박혀서 버스가, 피켓이, 플래카드가, 양동이가 되었다. 못은 목판을 찢으며 솟아올랐고, 촘촘하게 몸을 맞대면서 풍경의 세목들을 그려냈다. 못들이 엉겨 붙을수록 장면은 더 뚜렷해졌고 목판은 이 장면들을 지탱하느라 몸살을 앓았다.

<불타는 광주대단지>는 불타는 지프다. 그는 검은 연기를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재구성했다. 『주역』(설괘전5)에서 “불의 형상은 밝음에 있으니 밝다는 것은 온갖 사물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離也者明也, 萬物皆相見)”이라고 했고,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은 긴장의 다양함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지는데,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이는 생동하는 것이라 했다. 불새 피닉스는 자신의 고유한 불로 타버리지만 또한 자신의 고유한 재에서 부활한다.

<불타는 광주대단지>와 <촛불>의 불은 피닉스의 불일 것이다. 스스로 타고 사라져야만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날의 불은 소방차와 경찰을 불러들였으나, 비를 맞으면서도 주민들은 끝까지 결판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찰기동대 7백 명과 사람들이 맹렬히 덤볐고 그 탓에 광주경찰서 성남지서, 남문주유소, 경찰 차량도 불탔다. 곳곳에서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렇게 오후 5시가 되자 서울시장은 주민들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다.

그날 타올랐던 화염의 불꽃은 모두를 밝히는 불꽃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동하는 불꽃이었다. 스스로를 태워서 죽어야만 다시 살아나는 불꽃이었다. 이돈순은 이 불의 꽃씨를 못의 날카로운 발끝으로 피워 올렸다. 불꽃은 쇠못이 검게 타오르는 불온한 열기로 가득했다. 어떤 못들은 구부러져서 비틀거렸고 한꺼번에 쏟아질 듯 휘청거리며 활활 거렸다.

#3. <광주대단지 풍경-참외 실은 삼륜차>, <폭리분양권>, <상처> :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작가는 인도의 한 신문 매체 힌더스탄 타임즈(Hindustan Times) 2014년 3월 25일자에 실 린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이 사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카츠바흐의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리는 예술 프로젝트 퍼포먼스였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누워서 죽은 이들을 추모했다. 로이터 통신이 타전한 기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2014년 3월 24일

“프랑크푸르트 ‘카츠 바흐’ 나치 강제 수용소 희생자 528명을 추모하는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사람들이 보행자 구역에 누워 있어“

 

사람들은 2014년 3월 24일 프랑크푸르트의 ‘카츠바흐’ 나치 강제 수용소 희생자 528명을 추모하는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행자 구역에 누워 있다. 옛 애들러 산업공장의 일부인 카츠바흐 수용소의 수용자들은 1945년 3월 24일 부헨발트와 다하우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어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카츠바흐 희생자 528명은 프랑크푸르트 중앙묘지에 안장돼 있다. (카이 파펜바흐/로이터)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사람들은 본래 판자촌의 삶부터 비극이었다. 정부는 그 비극의 삶에 희망을 입혀서 강제 이주시켰고 결과는 비참이었다. 나무만 베어놓은 산비탈에서 천막살이를 시작했으나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죽어갔다. 1971년 『월간중앙』 10월호는 “르뽀 광주단지 4박 5일”이라는 기사에서 “산모는 그동안 꼬박 굶었다, 어린애를 낳았는데 삶아서 먹었다. ... 신문사에서 현상 걸고 ‘소스’를 캤는데 실패했다는 소리도 있고. ... 광주단지가 하도 비참하니까. 밤에 시장에 나가면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 많습니다.”고 적고 있다. 박태순이 쓴 기사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증언한다. 대단지는 강제 이주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국가는 가난한 국민을 죽음의 황무지로 몰아넣고 방치했다. 봉기한 사람들은 그 터전을 불질렀다.

분노한 사람들은 차량 하나를 불러 세웠다. 트럭에는 참외가 실려 있었고 며칠 째 굶주린 사람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 사람들이 트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샛노란 참외가 진흙탕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한 트럭분의 참외는 그 자리에서 동이 났다.

이돈순은 비탈길을 오르다 기울어진 삼륜차로 그 장면을 재현했다.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차가 기울자 짐칸에 실린 엄청난 양의 참외가 쏟아지는 장면을. 가로로 길게 형상화한 이 작품은 기운 차량과 쏟아지는 참외의 상황을 매우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지는 참외 밑으로 힌더스탄 타임즈에 실린 주검의 퍼포먼스를 배치했다. 바윗돌만한 참외가 쏟아지면서 사람들은 맥을 못 추고 깔려 죽는 꼴이다.

그는 왜 이 두 장면을 이었을까? 왜 학살에 빗대었을까? 그날 사람들은 정신 줄을 놓았다. 이쪽저쪽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막무가내였다. 약탈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맞서야 할 대상을 상실하는 순간이었다. 무정부 상황에서 사람들은 분노의 폭발을 터트렸으나, 처음엔 맞설 대상이 없어서 불질렀고 맞설 대상이 나타나자 투석전과 육박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참외 사건’은 벌어졌다.

‘인간다움’의 힘은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지켜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대단지는 최소한의 ‘인간다움’마저 비참하게 무너뜨렸다. 이 사건에서 그는 공동체의 붕괴와 상실을 사유한다. 가장 큰 원흉은 박정희 독재정권이었다.

그는 ‘인간다움’의 상실과 실존의 비극성을 캐묻는다. 미송 합판을 뚫고 찌를 듯 솟구친 시커먼 못의 발끝이 조명 빛을 튕겨내면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러므로 성남의 미래 화두일 것이다. 성남이라는 공동체의 주인은 누구이며, 그 ‘주인됨’의 주체가 불러일으켜야 할 ‘서로주체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4. <가리워진 길> :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도시가 탄생한 지 50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곳저곳에서 집이 헐리고 있다. 급조한 삶의 바탕이 송두리째 뽑히고 있는 중이다. 뽑혀서 드러난 산하의 몰골에서 50년 전의 시간도 채굴되는 중이다. 이돈순은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재개발 철거지역을 걸었다. 묵묵히 걸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횡단하는 발은 땅에 붙어서 갔다. 한 발에서 집이 깨지고 두 발에서 땅이 울었다. 그 깨지고 우는 소리로 길은 이어졌다. 영상은 빈집이 해체된 몰골을 그대로 보여준다. 길은 깨진 유리 파편들과 창틀과 대문과 온갖 쓰레기로 넘실댄다. 간혹 텅 빈 창문 사이로 어둠이 들락거리다 발자국 소리에 놀라 도망치는 순간을 엿본다. 그는 길 끝의 가림막 앞에서 멈추고 영상은 페이드 아웃(fade-out)된다.

마가는 예수를 둘러싼 군중을 오클로스(Ochlos·민중)로 기록했다. 그들은 세리, 병자, 매춘녀, 천민의 자식들이었다. 약자이자 소외된 자들이요, 몫 없는 자들, 곧 타자화 된 주체들이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그들을 예수사건의 주인공으로 해석했다. ‘(역사적) 예수사건’은 예수가 이들 ‘오클로스:민중’과 벌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클로스:민중’은 그 최초 사건의 ‘담지자’이고 ‘전달자’이며, 마가의 시선에 비친 ‘해석자’일 터였다. 안병무와 함께 활동했던 서남동은 “예수의 출현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의 선포, 곧 투쟁”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 빈곤, 사회적.문화적 편견, 사실이 은폐된 어둠 속에 사는 무지,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작업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해방신학을 전개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신부는 『해방신학의 영성-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에서 “인간의 억압과 해방이 하느님-이런 문제에 대한 우리의 오랜 무관심으로 걸러진 하느님-을 무관심한 분으로 만드는 것 같은 곳에서 불의를 뿌리 뽑고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완전한 해방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피어나게 되었다.”고 썼다. 광주대단지사건는 민중의 실체를 의심 없이 드러냈고, 이후 민중신학이 싹트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이돈순의 작업에서 ‘민중 메시아’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 안병무가 처음 ‘민중 메시아’라고 했을 때, 그것은 전통 신학에 대한 반박이나 평신도의 신앙을 뒤흔들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다. 이상철이 간파했듯이, 고난의 역사를 뚫고 온 민중들의 실존적 고백이자,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민중의 자기초월적 행위와 언어로 파악한 혁명적 사유였다. 서남동이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소리 없는 소리를 위하여 입을 열고, 학대받는 자, 가난한 자들의 한을 풀어주자”(「잠언」31:8)며 빗대어 강조한 ‘한(恨)의 사제’로서의 실천도 떠올려보자. 그는,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는 아벨의 피 소리(「창세기」4:10)를 대변하고,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빼앗기고 얻어맞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누가」10:25), 일꾼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품삯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리도록 외치는 소리(「야고보」5:4) -이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자를 ‘한의 사제’라고 불렀다.

광주대단지는 현재형이다. 과거는 끝난 적이 없다. 50년의 과거와 현재, 다시 미래 50년을 상상하기 위한 예술적 실천과 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그 첫 화두를 못으로 새긴 강철 새잎의 풍경들에서 보았다. 오클로스 민중들은 예수의 목격자가 되고 증언자가 되었다. 성남의 미래는 다양한 주체들로 ‘목격’과 ‘증언’이 전승될 때 새로워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억투쟁의 역사다. 온전히 역사를 보듬는 사건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집과 도시, 서울이라는 중심으로부터 배제되어 강제이주와 철거민의 역사로 시작된 성남 원도시의 지역들이 불과 50년도 채 되지 않아 집단적 철거의 운명을 맞는 벼락같은 변화의 아이러니를 본다.”

_ 이돈순

■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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